자유로운 삶과 공간을 꿈꾸며

도서 Review/문학

살아 움직이는 하루를 찾아

창조의흔적 2012. 4. 20. 11:14

김려령 <완득이>

 

카바레에서 춤을 추는 아버지. 난쟁이에 꼽추 같은 모양새다. 어머니는 없다. 아니 없는 줄 알고 17년을 살았다. 17년 만에 알게 된 어머니, 베트남인이다. 게다가 집은 가난하다. 허름한 옥탑방에 살며, 국가에서 지원받는 햇반으로 끼니를 때운다. 반항기 가득한 문제아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주먹도 좀 쓴다. 완득이는 사회적 약자로 살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두루 갖췄다. 그런데도 완득이를 보는 내내 설렜다.


반 꼴찌 완득이와 일등 윤하와의 로맨스에 설렌 것은 아니다. (풋풋한 사랑이 부럽기는 했다.) 자신의 환경을 조롱하는 세상에서 꿈을 향해 한 발 내딛으며 일어서는 완득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완득이가 찾은 꿈은 킥복싱이다. 킥복싱이라는 스포츠에 완득이가 두근거린다. 싸움에서 져본 적이 없었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 그런 완득이가 시합에서 지고도 크게 웃는다. 지는 의미를 배우고, 시합에서 첫 승리를 거두기 위해 이를 악문다.


"멈춰버린 동네에서 내가 움직인다전에는 나만 멈춘 것 같았는데지금은 나만 움직인다느낄 수 있다나 지금 스텝 바이 스텝 중이다."


<완득이>를 보며 설렌 다른 이유는 담임 '똥주'라는 존재다. "얌마, 도완득." 똥주는 완득이를 계속 불러낸다. 완득이가 세상에서 왜 숨어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숨어서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키워갈 때, 숨지 못하게 그의 이름을 부른다완득이가 환경에 매몰되지 않도록. 킥복싱을 못하게 하는 완득이 아버지를 설득한다. 17년간 집을 나가 살아야 했던 엄마와 완득이도 연결해 주고, 가족이 하나로 살 수 있게 돕는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에도 완득이가 있다. 이들은 멋진 신앙 고백을 하면서도, 정말 해야 할 일을 찾지 못해 힘들어한다. 많은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을 피해 교회로 몸을 숨긴다. 가끔은 세상에 위축된 마음을 멋진 신앙 고백으로 감추는 것 같아 씁쓸해 한다.

 

이들은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산다. 자본주의는 어쩔 수 없이 자본(맘몬)을 섬긴다.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기준에 들어가지 못해 위축되고, 숨는다. 왜 숨어 살아야 하는지 모르고 살았던 완득이처럼. 거기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을 수도 없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부르심(소명)이 중요하다. 완득이의 경우처럼, 이들에게는 맘몬을 섬기지 않을 꿈이 필요하고, 똥주처럼 우리가 숨지 못하도록 불러줄 이도 필요하다. 가급적 자신이 꼭 봐야 할 것들을 보고, 해야 할 것은 직접 해야 한다.

 

꿈을 찾는 기독교인은 기독교인답게 아래를 향했으면 좋겠다. 기독교인은 위만 향하는 세상에 자신을 어떻게 끼워 넣을 것인가 늘 고민하는 존재여야 한다. 완득이처럼 꿈을 향해 달리는 이들의 성장 드라마를 보는 하나님의 가슴이 설렜으면 좋겠다. 자신의 꿈에 스스로 설레면서.

 

"흘려보낸 내 하루들. 대단한 거 하나 없는 내 인생, 그렇게 대충 살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거창하고 대단하지 않아도 좋다. 작은 하루가 모여 큰 하루가 된다. 평범하지만 단단하고 꽉 찬 하루하루를 꿰어 훗날 근사한 인생 목걸이로 완성할 것이다."

 

광성교회 청년회 회지 'U'에 쓴 서평입니다.